5/15이석(李䄷1627~1682) 판서공파 이석3-경헌4-통2-원근/인상-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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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어렸을 때 이름은 적(積)이고 자는 중거(仲車)였는데 만년에 석(䄷)과 중거(重擧)로 고쳤다.

아­빠 경헌(景憲)은 병조참판까지 지냈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부군은 그중 막내이다.

1627년(인조5년) 8월 23일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누차 성균관의 시험에서 수석을 하고 향시에도 합격하곤 했다.

그러나 정작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해 부모에게 영광을 주지는 못했다.

1663년(현종4)에 비로소 식년시 생원1등 1위 (1/100)에 장원으로 뽑히고 진사3등 65위(95/100)에도 합격하였다.

이해 가을에 빙고별검에 보직되었고 1664년 겨울에는 한성참군으로 옮겨갔다.

공은 송사를 처리할 때면 하급 관리들을 엄격하게 단속하였기 때문에 한성부판윤이 그 재능을 인정하여 우대하였다.

1666년 가을 종부시주부로 올랐고 공조좌랑으로 옮겨갔다.

1667년에는 공로상으로 3품을 받았고 1668년에는 신계현령이 되었다.

공이 신계로 부임했을 때 읍에서 군량미를 주관하고 있었는데 포탈한 경우가 매우 많을 뿐만아니라 쌀을 빌려간 집이 없어져버려 받을 곳이 없기까지 했다.

전임자들은 사실을 은폐하여 죄과를 면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포탈한 세금을 감면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신계현만 그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공은 부임하여 실상을 듣고 관향사에게 보고여 조정에서 감면해 주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관향사가 처음에는 승낙했으나 중간에 방해한 사람이 있어 실행되지 못했다.

연말의 포폄에서 그런 사실이 누락되고 성적은 최하위가 되었다.

이로 인해 처벌을 청하게 되었고 1669년(현종10) 봄에는 관직을 삭탈 당했다.

민유중이 다음 관향사로 와서 공의 보고서를 보고 경탄하며 바로 왕에게 보고하여 탕감 받은 수가 1000여석에 이르렀다.

지금까지도 신계현 백성들은 공의 덕을 칭송하여 잊지 않고 있다.

1670년 겨울에는 공조좌랑으로 서용되었고 얼마 뒤 임피현령이 되었다.

이때 마침 크게 흉년이 들어 지성으로 백성들을 구제하니 일대가 굶주려 죽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관찰사가 진휼을 잘하였다고 포상을 청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공은 명예를 구하고 상을 좇는 것을 싫어하여 준비한 식량의 양을 말하지 않아 혼자만 상을 받지 못하였다.

1675년(숙종원년) 여름에는 친혐(親嫌)으로 관직을 떠났다가 1676년 겨울 영덕현령에 제수되었다.

영덕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접하고 있어 토질은 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했다.

부군은 어염과 화전의 조세로 민역을 보충하였고 전세나 대동미, 세폐(歲幣)등을 모두 관비로 냈으며, 관사나 창고를 수리하면서도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다.

이렇게 몇 년 지나니 백성들은 편안해졌다.

읍이 수해를 당하기 쉬운 곳에 위치해 있어서 관가나 민가가 항상 침수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둑을 쌓아 막고 수로를 따로 내어 물을 끌어내니 역사가 한 달 여 만에 끝난 뒤로 수해는 영원히 없어졌다.

1680년(숙종6) 봄에 어사가 군과 읍을 시찰하면서 부군의 치적이 도에서 으뜸이라고 조정에 보고했고 왕은 포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사(有司)가 평범한 일이라고 주장하여 상을 내리지 않았다.

부군은 경력으로 보아 3품을 얻어야 합당했으므로 5월 달에 비로소 상주목사에 제배되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고속 승진이라고 논하여 다시 바꾸었다.

10월에 청도군수에 제수되어 영덕을 떠나게 되자 백성들이 추사비(追思碑)를 세웠다.

1681년에는 성주목사가 되었는데 1682년(숙종8) 5월에 일이 있어 용궁(경북 예천)에 갔다가 병을 얻고 돌아와 6월 29일 관사에서 사망하였다.

나이는 56세였다.

이해 7월에 반구하여 9월에 충주의 황금산에 장례를 모셨다가 1683년 10월 광주의 경안역 서사동 계향(癸向)을 등지는 언덕에 개장했다.

부군은 효도하고 우애하며 인자하고 중후했으며, 행동거지가 자상하면서도 신중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엄하여 절도가 있었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허심탄회하게 대하면서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귀하든 천하든, 현명하든 어리석든 모두 감복하고 아끼며 즐거워했다.

평소 거처할 때는 마음을 안으로 거두고 스스로 지켰으며, 관직에 있을 때도 명예를 구하지 않고 백성의 편리함을 추구하였다.

문서는 삼가하며 다루었고 내고 들이는 것은 손수 하였다.

부임할 때는 텅 비었던 고을이 이임할 즈음에는 창고가 가득 차게 되었다.

빈곤한 친구는 극력 도왔으나 권세가에게 뇌물을 주고 이익을 얻지 않았으며 기름진 음식으로 살찌지도 않았으니 그 담백하고 욕심 없음이 이와 같았다.

부인 풍산심씨는 좌의정 수경(守慶)의 4세손 우부승지 심노의 딸이다.

18세에 부군에게 시집와 부군보다 17년 후인 기묘년 12월 2일 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부군의 묘 오른쪽에 부장하였다.

부인은 분명하고 자애로웠으며 부지런하고 민첩하였고, 시부모를 효성과 공경으로 섬겼으며 동서들의 환심을 얻었다.

90세인 시할머니 유씨 부인이 위에 있고 자손도 많았으나 부인이 위아래로 주선하면서 예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니 유씨 부인이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였다.

집안 형편이 본래 가난하여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했으나 항상 학문에 힘써 입신할 것을 권면하였고, 선대의 검소함과 절도를 들어 본보기로 삼도록 하였다.

자녀 일곱을 낳았으나 2남밖에 기르지 못했다.

장남 희무(喜茂)는 현재 강원도관찰사로 있어 공과 공의 부인이 추은(推恩)으로 직급이 올랐다.

1703년(숙종 29년) 5월에 경기도 광주시 장지동에 건립된 공(李䄷)의 묘갈이 있는데 묘갈의 찬자는 박세당이고 서자는 이덕성이며 제액은 김진규가 전서로 썼다.

당시 공의 손자 홍문관교리 탄(坦)이 스승 박세당에게 부탁하여 쓴 것이다.

​목사공 이석(李䄷)비석朝鮮 通訓大夫 星州牧使 贈 嘉/조선 통훈대부 성주목사 증 가善大夫 吏曹參判 李公䄷之墓/ 선대부 이조참판 이공석지묘贈 貞夫人 豊山沈氏 祔右 / 증 정부인 풍산심씨 부우묘갈전서朝鮮 通訓大夫 星州牧使 尙州鎭管 兵馬同僉節制使 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副摠管 李府君 墓碣銘 幷書崇政大夫 判中樞府事 朴世堂通政大夫 兵曹參議 李德成嘉善大夫 行 弘文館副提學 兼經筵參贊官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 金鎭圭 篆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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